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의 사변적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동적 순종을 통해 율법의 의를 획득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가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율법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거나 구원을 받는 방법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이 증거하기 때문이다.이것에 대하여 칼빈도 갈라디아 강해설교에서 자세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약속은 적절하지 않으며 구원을 받는데 부분적인 도움밖에 주지 못한다고 잘못 생각하지 않게
우병훈 교수는 능동순종과 루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16세기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신 3:21, 요 1:6, 갈 4:5, 갈 3:13에 대한 설명에서, 때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고 볼 때도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분하여 각각이 우리를 위한 순종의 행위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1535년에 출간된 대(大) 의 갈 4:5에 대한 설명에서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행하신 능동적 순종이 신자들의 공로가 된다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킨 로마교회는 자신들의 교리를 확증시키기 위해 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상황적으로 적용시켰다. 이에 칼빈은 이들의 가증스러운 행위들을 미친개들, 아니면 협잡꾼들로 비난하였다.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신학의 현장에서 같은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을 능.수동적으로 나눈 것이 마치 성경적이며, 전통적 개혁주의신학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능.수동적인 순종이 (성경에서 말하는) 개혁주의 전통의 가르침인가?최근에 온라인에서 강의한 교수들
현대교회는 신앙과 신학이 다르다. 신학은 교수들의 연구물들이라고 하여 학문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어떤 이교도들의 자료들, 또는 우상숭배자들의 저술도 기꺼이 수납하고 함께 손을 잡는다. 이제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전도를 위해서는 무당과 함께 노래하고 굿을 하는 것도 이제는 아주 자연스러운 연합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거짓과 우상숭배를 단 한 번도 용납하신 적이 없다. WCC와 WEA에 대하여 반대하는 일부 한국교회와 목사들은 여전히 고리타분하고 막혀있는 보수골통들로 손가락질을 당하고
우리는 행위언약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반성을 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개혁신학자들의 반성 없는 신학 개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행위언약이 웨민신앙고백서에서 나온다고 하여, 그것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고백서가 성경처럼 무오하다고 하는 어리석은 교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고, 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고백서에 대해 어떤 흠을 찾아 신앙고백서 전체가 잘못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코로나19 전염병에 대한 국가적 방역에 성도는 순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작금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자들은 성도가 국가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면, 마치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는 것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이러한 무지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야기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치하는 일을 이중적 통치개념으로 가르치고 있다. 먼저 영적인 통치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영적 관할권(spiritual jurisdiction
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독특한 것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중에 부모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데리고 나올 때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주님 당신에게 나오는 것을 허락하시고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 갈 수 있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는 주님의 이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현대 신학 가운데 실용주의 신학은 어린 아이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지식적이지 않고 단지 상대방에 대한 신뢰에 그 바탕을 둔다고 가르친다. 물론 너무 어린 아이는 여전히 부모의 손길에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한다. 하지만 어린 아이가 자신의 지각을 가
최근 우리는 개혁신학에 대한 상반된 논의를 대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신학의 정당성을 해명하고, 바른 신학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당사자 간의 토론과 대화의 모습은 사라지고 개인의 페이스북에서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아주 저질스러운 모습들을 본다.사실 필자는 정이철 목사와 노승수 목사의 신학적 견해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중간에서 서로 화해권면을 시도하였다. 우선 정이철 목사에게 노승수 목사에 대한 기사를 내려줄 것을 부탁하였고, 정이철 목사는 좋은 의도로 받아주었다.그런데 노승수 목사에 대한 기사가 내려가자마자 노 목사는 개인 페이스 북에서 정이철 목사가 기사를 내린 것에 대하여 조롱과 조소를 하면서 법적조치를 계속한다고 자신의 팔로워들에게 말한 것을 어떤 분이 캡쳐하여 보내주었다
개혁주의 신학자 존 그레샴 메이천은 오늘날 현대교회가 신비주의와 은사주의로 기울어진 것은 신앙에 대하여 반지성적인 영향이라고 보고 있다. 현대 기독교의 신앙을 반지성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정확히 지적인 것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이다.기독교가 지성적이라고 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은 예를 들면,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 당시 삼위일체라고 하는 교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런 용어들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기독교에 대하여 단 한 번도 바르게 배우려고 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오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가?예수님은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는 자들에게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교회를 찾고 있다. 교회를 다니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교회를 쉽게 떠나 다른 교회로 옮긴다. 이 때 한 결 같이 말한다. “그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우리가정과 맞지 않는 교회라고 여겨 교회를 옮기기로 했습니다”고 한다. 사실 자신과 맞지 않는 교회라고 해서 교회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목사와의 갈등, 아니면 성도들 간의 문제, 또는 당사자 자신이 부도덕한 모습을 보여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교회를 찾는다. 최근에 교회를 떠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더 좋은 시설과 환경이 마련된 교회를 찾아 떠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 자들은 아주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마치 자신들이
필자는 우리 교단(예장 합동)의 김성곤 목사의 두날개 프로그램에 심각한 이단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총회가 판단하여 달라는 헌의안을 발의하는데 앞장선 사람이다. 두날개 헌의안을 노회를 통해 총회에 상정하게 된 이유는 김성곤 목사의 두날개의 신학 사상이 매우 위험스러워보였기 때문이다.김성곤 목사와 두날개 관련자들은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합동 총회와 이대위는 가급적 심각한 문제가 없다면 합동에 소속한 김성곤 목사에게 큰 손해가 없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단성이 없다면 우리 합동 총회의 이대위가 이유없이 김성곤 목사와 두날개를 훼방할 이유가 없으므로, 김성곤 목사와 두날개 관련자들은 편안한 맘으로 기다리면 될 것으로 생각된다.그런데 (현)총회장 전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회에서 강조되는 것은 성경의 법이다. 특히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배우고 순종해야 하는 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개혁신학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는 복음과 율법이 교회에서 선포되어지고 가르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복음만을 강조하고 있든지 아니면 율법만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과 율법이 균형적으로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교회를 찾아보기가 드물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서 일반은총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의 빛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법이다.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방인들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였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보이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하나
의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개혁신학을 설명하는 글을 연재하고 있는 임진남 목사가 요한계시록을 설명하는 책을 출판했다. 임진남 목사가 성도들에게 전했던 37회의 계시록 강해설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과 신학적인 방향성은 서철원 박사의 추천사에 잘 드러나 있다. 서철원 박사의 추천사로 임진남 목사의 책에 대한 소개를 대신한다."한국교회가 요한계시록 강해 설교에 집중했던 시기는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서 고난 받을 때와 광복 후 가난하여 어려움을 당할 때였다. 이때 계시록 강해 설교의 중심점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천년 왕국을 세우시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불신자들을 지배하고 가난을 벗어나서 넘치는 풍요 속에서 오래 살며 온갖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다.이런 설교로써 교회는 고난받는
대한예수교 장로교 합동측은 제83회 총회에서 사순절이 비성경적이므로 사순절을 지키지 말 것을 결의하였다. 왜 합동교단은 사순절을 비성경적이라고 하였는가?먼저 사순절이란 부활절 전날 밤까지 40일간 이어지는 로마교회가 정한 예수님의 수난 기간을 기념하는 행사절기이다. 로마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금식을 권장하고 음식을 제한하는 것을 기념하였다. 그러나 고난주간 특히 마지막 금요일에는 완전히 고기를 먹는 것을 금했지만 이것을 위해 사육제를 하고 고기를 많이 먹은 후에 점차로 고기 먹는 양을 줄여 갔다. 사실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기 위해 고난주간 마지막 금요일을 이렇게 금식하는 것으로 정했지만 오히려 사육제는 고기를 많이 먹기 위해 만들어진 날로 변질 된 것이다.이러한 비성경적인 절기를 종교개혁자들
현대신학과 현대교회는 성도의 성화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진다. 물론 정통교회와 개혁신학도 성도의 성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아주 적극적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성도에게 성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정작 성화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성도가 자신의 삶 속에서 성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은 거의 없다.현대교회가 성도의 성화를 이루기 위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신앙의 방법들이다. 오순절계통의 교회는 성령세례를 받으면 성도가 거룩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성령을 받으면 능력이 생겨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성령을 받기 위해 금식도 하고 기도원에서 철야를 하면서 몇 날 며칠을 기도한다.성도가 성령을
'성경과 분명한 이성에 의해 자신이 설득되지 않는' 한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루터의 이 유명한 말은 자신의 신앙이 무엇으로 인해 결정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배도한 로마 카톨릭의 거짓 신앙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성경의 말씀과 분명한 이성에 의해 자신의 양심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당한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로마 교회는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지만 하나님은 성경으로 로마 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신 것을 우리는 믿는다.로마 교회와 개신교의 차이 가운데 하나는 특별계시에 대한 무오성의 기준이었다. 로마 교회와 개신교는 성경이 무오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로마 교회는 성경과
유일한 기독교의 신앙이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니 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죽은 자의 무덤에서 기도하고 귀신과 신접하여 능력을 얻은 사람이다. 귀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여 준다고 해서 마치 그 사람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일부 목사들이 추앙하여 따른다.이러한 현상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마치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여겨 많은 성도들을 거짓 신앙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직도 일어난다고 하는 것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작금 한국교회에 타락의 한 부분을 말한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목회 세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목회자가 자신의 자녀에게 교회를 세습시키는 것을 타락한 것으로 보는가? 먼저 세습이란 단어의 의미는 돈(재산), 권력, 지위, 신분을 자손 대대로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목사가 자신의 목회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사실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목사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부와 권력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탐심이고 죄악이다.목회를 물려준다고 하는 것과 부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를 물려준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현대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마치 자신이 섬겼던 교회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을, 목회를 이어가게 하는 헌신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목사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
오늘날 현대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명예와 인기를 위해 성경을 쪼개고 나누고 말았다. 신학의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세분화시키고 있다.우리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과정을 보면 그것들이 세분화 되어 가르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약신학, 신약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조직신학 등 다양한 신학들이 가르쳐 진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 나가서 구역신학이라고 하면서 또 나눈다. 모세오경, 소선지서, 대선지서, 시가서, 역사서 등등. 계속해서 이렇게 신학들이 세분화되고 나눠지면서 마치 하나님에 대하여 더 깊게 알고 성도들에게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여긴다. 하지만 결국
성도들은 성경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성경 공부를 하다보면 많은 질문을 받는다. 때론 호기심 때문에 성경을 사변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목사)들은 모든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간혹 어떤 교사는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식으로 성도들에게 믿음을 강조한다. 어떻게 보면 의심하는 성도들 보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믿음으로 믿는 성도가 더 훌륭한 신앙인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기독교를 아주 미신적이고 비도덕적인 종교로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사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과 성경은 아주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이성적이다. 또한 논리적이다. 쉐런 키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