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각성 지도자 조난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2차 대각성 중심인물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 몰몬교 창시자 조세 스미스(Joseph Smith, Jr.,1805-44)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이 영적인 큰 일들을 행하기 이전에 공통적으로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특별한 영적인 체험이 있었고, 또한 그 장소도 숲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세 사람은 숲에서 기도하다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비범한 하나님 체험을 했다. 그리고 이후 다른 사람들에게 큰 부흥을 일으키는 신앙의 영웅이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1737년 어느 날, 조나단 에드워드는 기도하기 위해 말 타고 숲으로 가서
에드워즈가 1737년 말 타고 숲으로 갔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 그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의 종교적 체험으로서 신비적인 환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동안 아무도 이것에 대한 신학적인 비판을 시도하지 않았다. 조나단 에드워즈니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신앙의 굴레에서 벗어나 환상으로 예수님을 볼 수도 있었겠지 ... 하는 무지와 무책임한 자세가 우리 한국교회를 지배했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한국교회에서 에드워즈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에드워즈의 그 체험이 정상적인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한 말씀과 신앙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비적인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1737년 에드워즈에게 일어난 그 일이 무엇이
(만일 에드워즈가 그날 숲에서 정말 직통의 예수 환상을 보았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거짓 영의 미혹이었습니다. 그가 정말 직통의 예수 환상을 보았다면, 이후 대각성 부흥에서 벌어진 수많은 이상한 웃음, 이상한 울음, 몸의 마비, 몸의 진동, 쓰러짐과 실신, 입신 등의 거짓 영의 장난들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날 에드워즈가 숲에서 본 것이 직통의 예수 환상이 아니고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었다면, 에드워즈의 신앙의 건전성을 굳이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읽어보시고, 생각해 보시지 않겠습니까?)저는 선하고 진지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에드워즈의 부흥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사람입니다. 미국의 2차 대각성을 일으킨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2018/10/29] 미국 대부흥을 이끌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와 그의 정신을 계승했던 이들에 대해, 사람들이 칭송만 하지 비판하지 않았던, 아니 하지 않으려 했던 부분을 정이철 목사(바른믿음 대표)가 개혁신앙의 관점에서 지적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25일 열린 '바른믿음 아카데미'에서다.정이철 목사에 따르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칼빈주의 관점에서 1700년대 당시 유행했던 알미니안주의와 싸웠던 최고의 전사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에드워즈는 1734년 31세 때 1차 대부흥을, 1740년 37세 때 2차 대 부흥을 견인했던 인물이다. 2차 부흥 때는 조지 휫필드와 함께 했다.에드워즈는 아버지
지난 10월 25일 서울 합정동 100주년 기념교회 사회봉사관에서 열린 에서 정대운 목사(삼송제일교회)는 신앙고백서 교육 목회에 대해 강의했고, 정이철 목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에 대하여 강의했다. 정대운 목사의 강의는 교리와 신조를 다루지 않는 현대의 복음주의 교회들에 출석하는 신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또한 정이철 목사의 강의는 많은 사람들이 크게 존경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을 다루는 세미나였으므로 더욱 더 예민한 관심을 받았다. 그 동안 에드워즈의 좋은 면들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던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
(에드워즈가 남긴 글 등의 자료를 더욱 보강하였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나는 대로 구체적인 자료들을 더 보강할 것인데, 이제 미국과 한국의 를 위해 떠나야 할 시간이 되어 당분간 못하겠습니다. 에드워즈 부흥은 17세기 판 빈야드 부흥이었다고 말해도 아주 틀리지는 않습니다. 에드워즈 부흥을 무조건 감싸면 빈야드-신사도 기름부음 사상을 수용하여야 합니다. 심각한 면을 감추고 좋은 부분만 부각하여 우상으로 만드는 것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에드워즈 전문가로 명성을 얻으므로 어떤 면에서 속임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1740-42년에 일어난 에드워즈의 2차 부흥, 즉 역사에 ‘1차 대각성’(the First Great Awakening)이라고 명명된 부흥에 대해 알아보자. 그 동안
누가 뭐래도 에드워즈는 칭의-구원론에 있어서 종교개혁 핵심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너져가던 칼빈주의의 기치를 다시 세운 사람이었다. 1703년, 그는 당시 영국의 코넥티컷 식민지의 Winsor에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나기 2년 전 코넥티컷의 세 개의 도시에서 수업이 진행되는 한 대학이 생겼다. 1718년, 그 세 개의 캠퍼스는 코넥티컷의 New Heaven으로 이전되어 통합되었다. 이 학교가 지금의 세계적인 명문 예일대학이다.1636년에 메사츄세츠 식민지에서 시작된 Harvard 대학이 있었음에도 왜 청교도들은 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을 가진 목회자, 신학자, 그리고 부흥운동가였다. 에드워즈의 칼빈주의 신앙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에드워즈는 예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성장했다. 디모데의 지옥의 비참함에 대해 신자들이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설교하는 기법, 인간의 참된 회심의 과정과 증거에 대한 강조, 그리고 성찬의 의미와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신앙 조건 등에 대한 신학적 신념은 훗날 에드워즈의 목회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에드워즈가 정통 칼빈주의자로 성장하도록 신앙의 기본 바탕을 제공한 사람은 그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였다고 보아야 한다. 에드워즈가 정통 칼빈주의자로 성장하도록 실질적으로 인도한 사람도 디모데였다. 디모데 자신은 하바드 대학(Harbar
조나단 에드워즈는 철저한 칼빈주의 목회자였고 부흥운동 신학자였다. 과연 에드워즈는 어떻게 칼빈주의자가 되었을까? 무엇이 그를 철저하게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추구하고, 칼빈의 신학 사상을 수호하는데 앞장서는 사람이 되게 만들었을까? 에드워즈가 정통 칼빈주의로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크게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요소를 살펴보자. 에드워즈의 아버지 디모데의 설교와 가르침에드워즈는 1703년 신대륙의 대영제국의 코넥티컷 식민지의 이스트 윈저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그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가 에드워즈가 태어나기 전부터 담임목회를 시작하여 60년 이상 목회했던 도시이다. 디모데는 그 교회에서 은퇴하고 약 2-3년이 지난 1758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
에드워즈는 영국의 신대륙 코넥티컷(Connecticut) 식민지의 이스트 윈저(East Winsor)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미국 코넥티컷 주 지도를 보면 북쪽에 이스트 윈저가 있고 남쪽에도 사우스 윈저가 있다. 도시가 발전되면서 두 개의 도시로 나누어졌고 명칭도 달라진 것이다. 에드워즈가 태어날 때의 이스트 윈저는 현재의 사우스 윈저에 해당된다고 한다.에드워즈의 아버지 디모데는 메사츄세츠 보스턴의 하바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1694년 11월 솔로몬 스토다드의 딸 에스더와 결혼했다. 디모데는 이스트 윈저의 회중교회 ‘윈저 제2교회’(the Second Church of Windsor)의 청빙을 받았으므로 결혼 후 8일 만에 이스트 윈저로 이사하였다. 이후 디모데 목사는 62년 동안 그 교회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에 태어났고 1758년에 죽었다. 에드워즈의 생애와 대각성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에드워즈가 살던 때는 다음과 같은 시대였다. 1. 영국의 뉴잉글랜드 식민지 시대에드워즈 시대에는 지금의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드워즈가 살던 북아메리카 땅은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이 북아메리카 신대륙에 만든 첫 번째 식민지는 1607년 영국 국왕의 승인을 받은 런던 회사가 현재 버지니아 주에 속한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 인근에 세운 ‘제임스타운’(Jamestown)이었다. 신대륙에 생긴 최초의 영국 식민지는 영국 왕의 승인 하에 자치권을 가진 곳으로 출발했으나, 1624년에 자치권을 박탈당하고 영국
(이전에 이미 올렸던 기사인데, 중도언약에 대해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총신신대원 이상웅 교수님의 책에서 좋은 자료를 얻어 보강한 후 다시 올립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회와 부흥을 연구할 때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한 사람은 에드워즈의 어머니 에스더(Esther Stoddard)의 아버지, 즉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 1643-1729)이다. 스토다드는 1669년부터 1729년까지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노스햄프턴 교회의 담임목사였다. 1726년, 스토다드는 24세인 외손자 에드워즈를 부목사로 청빙하였고 3년 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스토다드의 뒤를 이어 에드워즈가 노스햄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스토다드의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아버지 디모데 에드워즈(Timothy Edwards, 1669-1758) 목사이다. 디모데 목사는 너무도 유명한 자신의 아들 때문에 명성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도 그 시대의 뉴 잉글랜드의 교회들과 목회자들 사이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고, 놀라운 부흥을 이끌었던 뛰어난 목회자였다. 훗날 에드워즈는 1734년 경에 했던 설교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놀라운 부흥을 이끌었던 탁월한 목회자였다는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1)“노스햄프턴을 제외하고 뉴잉글랜드 서부 지역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은혜를 경험했던 곳은 나의 아버지가 목회했던 곳이었다”“나의 아버지가 목회하는 곳에 4-5 차례의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다.”
원래 영국에서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가문의 조상은 언제 미국으로 이주했을까? 최초로 미국으로 이주하는 영국 사람들을 태우고 대서양을 건넌 '메이플라워 호'(The Mayflower)가 메사추세즈(Massachusetts) 주 플리머스(Plymouth)의 케이프 코드(Cape Cod) 해변에 도착한 때는 1620년 11월이었다. 그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의 청교도 신자 102명 속에 에드워즈의 직접적인 조상은 한 사람도 없었다.에드워즈를 연구한 전문 학자들과 전기 작가들의 글을 종합해 보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에드워즈의 가문의 조상의 이름은 앤 에드워즈(Ann Edwards)이름의 여성, 조다단 에드워즈의 먼 할머니되는 사람이다. 앤 애드워즈라는 할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swards, 1703~1758)에 대한 이야기를 틈틈이 써 보려고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차 대각성 운동(The First Great Awakening)의 중심인물이다. 너무나 중요한 일을 이끌었던 유명한 인물이니 연구해 보면 얻을 것이 많을 것이다.요즘 한국교회의 화두는 부흥이다. 한국교회가 성장의 한계점에 도달한지 오래되었다. 정체상태에서 머물고 있는 한국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징조들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부흥에 대한 향수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고, 부흥의 원리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더 뜨거워지고 있다. 2차 대각성의 중심 인물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는 원죄의 효력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