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자유주의자들과 교회연합운동가들과 또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넓어진 선교관’은 정당한가? 교회의 사명(mission)은 복음 전도 외에 사회정치활동을 포함하는가?‘교회의 선교’란 무슨 뜻인가?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은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하나의 단체이다. 또 선교(宣敎)란 문자적으로는 ‘교(敎)를 선전하는 것’이라는 뜻이지만, 영어의 미션(mission)은 ‘특수한 임무’ 즉 ‘사명(使命)’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교회의 선교란 단체로서의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이다. 성도들의
고든콘웰신학교의 등록 수 감소, 예산 적자, 교수진 및 교직원 감축의 수년간 이어졌다. 이 학교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해밀턴에 있는 102에이커 규모의 주(main) 캠퍼스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이 역사적인 복음주의 신학교는 보스턴 캠퍼스로 이전할 계획이다. 플로리다와 노스캐롤라이나 캠퍼스에서는 위성 캠퍼스를 계속 운영하고 온라인 학위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다.총장 스컷 선퀴스트은 CT와의 인터뷰에서 이 대담한 움직임이 성공한다면 신학교는 “30년 동안보다 더 나은 재정적 기반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밀턴 캠퍼스는 로
1. 기독교와 불교기독교는 창조-타락-구속의 세계관을 믿는 위로부터(창조주 하나님)의 초월 계시를 믿고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해탈에 이르기 위한 아래로부터(인간 중심)의 방법론을 추구하는 종교이기에 접근 방법이 전혀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2. 불교와 아인슈타인, 양자론따라서 양자역학이 인과(원인과 결과: 이게 과학의 기본 전제입니다)를 다루는 불교의 연기법을 연상시킨다고 보는 것이나, 아인슈타인이 불교가 물리학에 영감을 주는 종교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인슈타인은 평생 동안 양자론은 불완전하다고 했는데, 양자론의 슈뢰딩
우리는 오늘날 교회들에서 선교 개념의 변질뿐 아니라, 사회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WCC 헌법은 그 단체의 한 기능을 진술하기를, “인간의 필요에 대한 봉사, 사람들 간의 장벽들의 제거, 및 한 인류 가족의, 정의와 평화 증진에 있어서의 교회들의 공동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데이빗 스토우는 1980년 WCC 멜본 세계선교와 전도대회에 관해 말하기를, “멜본 대회는 사회 활동에 관한 대회보다 훨씬 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들에 집중하였다”고 하였다.교회연합운동가들은 사회적 관심과 활동이 그리
질문>정이철 목사님! 총신신대원에서 교수도 하고, 칼빈의 시편 찬송만이 진정한 찬송이라고 하는 분에 대한 것입니다. 편의상 '서시편 교수'라고 하겠습니다. 아담에 대해 매우 독특한 이론을 가르칩니다. 아담이 무엇을 하지 않으면 영생과 완전한 생명을 얻었을 것이고, 무엇을 하면(불순종하면) 사망에 이르도록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론이 창세기 어디에 근거하는지 아세요? 그거 이단사상 아닌가요? 목사님은 이단을 잡는 전문가라고 하던데, 잡아야 할 사람 아닌가요?그 분은 칼빈도 아담이 자기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기 위하여 허락된 시간
“짐승의 수”이면서 “사람의 수인 666”은 요한계시록 13장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이다. 즉 성경 안에 직접적으로 비교 가능한 본문이 없다. 솔로몬의 세입금 중수 “666”(대하 9:13; 왕상 10:14)이라는 구절이 있으나 이것은 “666 금 달란트”라 “인간의 수 666”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이렇게 성경에 단 한번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를 하팍스레고메나(Hapaxlegomena)라고 한다. 하팍스레고메나는 비교 가능 구절이 없는 관계로 해석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의 경우 단어 자체의 본 의미를 따져보고
가 펼치는 ‘사도행전 30장 운동’(ACTS 30 MOVEMENT)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은혜로 주어진 구원에 감격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 소식 전파에 전력하는 생명(zoe) 운동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1:16)라고 했다. 우리는 복음전도, 교회개척, 하나님 나라 건설에 매진한다. '칼빈주의'라고도 일컫는 개혁주의 신학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의 취약한 면을 극복하고자 한다. 개혁주의 전통은 기독교 역사에
법과 정치의 종교 기독교기독교처럼 법과 정치에 민감한 종교가 있을까?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 하시고 방치하지 않으셨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일정한 언약의 법을 제정하셨고 성경 2930명의 실명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친히 “내 친구”라 한 아브라함과도 언약을 맺으셨다.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타는 횃불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도록 했으니 언약을 어기면 그 심각한 죄악의 결과에 대해 경고하는 의미였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 아담과 언약을 맺었듯 법이었다. 이렇게 법은 진화한 인간이 찾아낸 질서가 아닌 창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으로 신학한다. 곧 믿음으로 신학한다. 믿음으로 신학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그 계시의 말씀으로 신학함을 말한다.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라는 제목으로 말할 때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아니하느냐를 이성으로 증명하는 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우리는 앞으로 배울 하나님의 존재 곧 인격을 살피려고 한다. 성경과 창조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자기 존재의 계시를 살피는 것이다.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창 1:26-27).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성의 역사에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넓어진 선교관의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선교(宣敎, mission)는 주 예수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켰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 얻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에 대한 이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개념이 변질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죄인들의 영혼 구원의 활동으로만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행할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1. “땅 정복”, 하나님의 명령“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결혼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한 것은 명령이었습니다(창 1:27-28). 그런데 복 주신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라는 용어는 조금 특이합니다. ‘정복’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카바쉬’(כיבוש)는 군사 용어이기 때문이지요. 전쟁은 잔인합니다. 따라서 이 정복하다는 의미에는 짓밟다, 약탈하다, 굴복시키다 등 강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아람과 모압과 암몬 그리고 블레셋 사람과 아말렉을 정복한 사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는 에베소에 있는 열두 명 가량의 '제자들'이 등장한다(행 19:1,7). 바울이 이들과 대화를 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고 답했다.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고 했다. 바울은 이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한 말을 일러주었다.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고 말했다. 세례 요한이 가리키는 분은
“(10분 30초 정도) 우리가 방언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방언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누구나 하나님 백성이 되는 새로운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였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문을 이방인들에게도 열러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들만 하나님 백성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도 이제부터는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하나님론 (신론)은 하나님의 인격과 그의 속성과 사역에 대해서 배우는 신학이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배우고 하나님이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도 살핀다. 모든 사역에서 작정을 세우셔서 일하심과 그 중심점으로 창조경륜을 가지셨음을 살핀다.하나님론은 이렇게 하나님 자신에 관해서 배우므로 신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하나님론을 신학정론 (神學正論)이라고 한다.1.1. 정의하나님론은 하나님의 존재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그의 작정과 사역에 관해서 배우는 신학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에 대해서 배운다. 하나님의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은 때때로 자신을 대단한 지도자로 높이고 교만해 보인다. 벤틀리는 암을 고칠 때 사람들을 치거나 부츠를 신은 발로 걷어차는 등의 행위를 한다. 소강석 분당 새에덴교회(예장 합동) 목사는 성경보다 목사의 강단 설교가 위에 있으며 성도들의 존재 목적이 목사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경은 이단자들의 특징으로 교만을 들었다(벧후 2:10; 유 8, 11, 14).또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은 때때로 음행 문제로 몰락했다. 1991년 가을, 밥 존스의 부도덕한 섹스 행위가 폭로되었다. 2004년 폴 케
교황의 무류성은 교황이 하는 모든 일에도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가령 성인 (聖人) 책봉과 비계시적인 진리와 철학적 진리들의 선포에도 무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의 무류한 설명으로 계시가 확정되고 오류에 대항하여 교회가 보호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황의 무류한 교리 결정들은 취소불가하다는 것이다. 주교들이나 공회의의 확증도 불필요하고 증명도 불필요하다. 교황의 무류한 결정은 증명 획득으로 승인을 받는 것이 아니다. 무류한 교리 결정의 검증은 계시에 들어 있음을 밝히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무류한 신앙선포는 신앙법칙 성격이어서 순종의
또 로마교회가 교회로서 성경을 해석해야 할 이유는 성경이 그 자체로는 죽은 문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이 교회의 산 말씀과 결합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보증이 교회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Schmauis, KD, III-1, 754. 756).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해주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령이 성경의 말씀의 선포에 역사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자기 가신성과 자기 증
은사주의자들은 때때로 교리적, 윤리적 탈선을 한다. 은사주의자들과 신사도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풍유적 성경해석(영해)을 선호한다. 그러나 풍유적 해석은 성경의 바른 교리와 윤리의 교훈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유익이 없고 오히려 방해가 되고 혼란을 준다.초기의 은사주의자 윌리엄 브래넘은 삼위일체, 원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요성을 부인했고 인간은 스스로 완전해질 수 있는 작은 신이라고 믿었다. 1949년 미국 오순절 교단조차도 브래넘의 사상과 활동을 이단이라고 발표하였고 특히 사도와 선지직의 복원, 임파테이션[은
제 2 에베소 공회의(439)는 유티케스의 주장이 우세하여 정통 신앙을 가진 교부들 중 플라비아노스 (Flavianos)를 폭행하고 다른 교부들을 유배시켰다. 또 그 후 제 2 니카야 공회의(787)는 성상숭배를 바른 것으로 정하므로 우상숭배를 교리화하게 되었다. 이에서 나아가 제 2 바티간 공회의 (1962-65)는 종교다원주의를 교리화하였다.공회의가 항상 바른 교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없는 것들을 교리화한 경우가 많다. 가령 연옥 교리, 성도의 중보기도, 입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등은 공회의에서 정해졌어도 전혀 성경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