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조금 씩이라도 성경을 읽으려고 애쓴다. 바르게 사는 길은 성경에 있고, 다른 무슨 책보다 성경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유명한 누구의 신학보다 성경이 가장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허망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자신에게 들려오기를 구하고 기대한다. 그런 자세는 매워 허망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모든 말씀을 이미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하여 충분하게 주셨기 때문이다. 더 이상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어야 우리가 더 낳은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
한국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무시와 조롱 그리고 냉대를 당하게 된 결정적 배경에는 이단(Heresy)인 다미선교회의 ‘휴거’ 소동을 일으킨 사건(1992년 10월 28일)으로 한국교회에 깊게 자리 잡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 비극이다.그런데 이러한 종말의 신학적, 사회적 문제는 그 당시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ing) 중이기에 인터넷과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면 쉽게 찾아 읽고 볼 수 있다.그렇다면 왜 아직도 이러한 거짓 신학 사상에 놀아나고 주장하는 목사들과 신자들이 많은 것에 한국교회는 신학적 반성이 필
글을 시작하며어느 날 어떤 분에게서 이 메일이 왔다. 메일의 핵심만 요약하면 “옥성호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습니다. 옥성호가 쓴 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큰일이 난 것 같습니다. 이 책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일부 목사님들까지도 흔들리고 있습니다.”였다. 이 메일 전체에서는 에서 옥성호가 주장하는 몇 가지 사실들이 두서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처음에 필자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메일에 나열된 옥성호의 주장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전에 옥성호가 쓴 3권의
한국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가 많은데 심각한 신학적 문제는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과연 정통 기독교적 입장과 개혁주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생각해 보면 절대 아닌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지상 대위임(마 28:18-20)’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야 할 위대한 사명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초기교회부터 기독교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민족을 넘어서 이방 민족도 포용해 나가고 더 나아가서 성, 인종, 신분, 국가 차별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fa
글을 시작하며눅16: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과 함께, 마11:12(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해 나간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역사를 선포하는 귀중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번역 성경들의 오역과 오석으로 인해 마11:12의 말씀은 세계 교회사에서, 특히 한국교회에서 심각하게 오용되고 있는 사탄의 메시지가 되고 말았다. 아래 마11:12을 소재로 한 어떤 심각한 저질 설교의 한 부분을 보라.“~여기가 좋사옵나이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도울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가 싫다고 하나님 걸 빼앗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12제자의 한 제자 였던 ‘가롯유다’를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 칼빈주의의 입장가롯유다는 선택 받지 못 했기(유기되었기) 때문에 종국에 죄 가운데 버려두사 구원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1) 토기가 토기장이 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따질 수 없다(예레미야 18:1-12).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감추인 뜻에 의한 것이다. 2) 다른 열한 제자들은 가롯 유다가 마지막 때까지 예수님을 배반하리라고는 몰랐다.그가 예수를 배반하고 은 30냥에 판 그 당시는 그가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이고 그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는지 유기되었는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가롯
한국교회는 예배와 집회에 ‘열성’을 가지기에 주일의 새벽기도회부터 시작해서 평일의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구역모임 등으로 정말 공적 모임이 많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종교적 현상이 바람직한가를 반성하고 무엇보다도 개혁주의(칼빈주의)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주일에 행하는 예배의 순서에서 각 교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특징이 반영되고 있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개혁주의 교회들은 담임목사의 생각으로 ‘예배순서’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교회들이 추구해 온 예배순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그렇다면 개혁주의 예배순서의 필수는 ‘8가지’이고, 시작은 예배의 부름, 참회의 기도, 시편찬송, 성경봉독 후 설교(성경봉독 후에 성가대의 찬양은 안되고 사실상 16세기 교회개혁을 통해서 성가대는 사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비교해 보자.1. 타락에 관하여1) 칼빈주의 T: Total Depravity(Corruption, Inability) 전적 타락(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죽은 상태이며 구원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믿음을 주셔야 믿는다. 구원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것이다.2) 알미니안주의 - 자연적 무능력인간의 전적타락은 인정하나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으로 인간 안에 복음을 듣고 반응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회복시켜 주셨다. 구원 얻는 믿음은 죄인(인간)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암소, 암염소, 수양 등의 짐승을 잡아서 반으로 쪼개고, 쪼개진 짐승들의 몸이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서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현상이 꿈이었는지, 아니면 비몽사몽간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이런 일을 특별계시 현상이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 계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일반계시(자연계시)가 있고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일반계시
한국교회의 ‘교회교육’이 미국의 시스템을 그대로 가지고 온 역사적 배경에는 선교사들이 1905년에 ‘선교사공의회’를 조직하고 ‘주일학교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시작이 되었고 서울의 연동교회, 평양의 장대현교회 등의 여러 교회에서 ‘소아회(小兒會)’라 칭하고 교재로 ‘주일학교 공부’라는 책이 나왔다.그리고 주일학교위원회는 1911년에 세계주일학교연합회의 자문을 받고 조선주일학교연합회로 발전이 되면서 초대 회장으로 서로득(M.L. Swinhart)과 부회장에 윤치호 등으로 전국의 주일학교를 통솔하게 하였지만 선교사공의회가 사업을 진행하였다.그리고 1921년에 ‘제1회 전국주일학교대회’를 서울의 승동교회에서 개최하였을 때에 5천명의 신자들이 참여하였고 1922년부터는 선교사공의회에서 자립하여 연합체를
교회에는 항상 각종 이단사상이 요란하게 들어왔다가 슬며시 사라지곤 했다. 지금은 평화와 용납과 관용이라는 미명으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종교통합 사상이 들어와있다. 그런데 이것은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교회로 자리잡으려할 것이다.종교통합은 세상에 퍼져있는 뉴에이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교회는 뉴에이지로부터 관상기도를 배우면서 종교통합 사상도 용납하게 되었다. WCCM(세계크리스천 관상커뮤니티)의 디렉터인 로렌스 프리먼 신부는 "관상기도를 이끄는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종교의 단일화’에 있다. 관상기도를 통해 세계평화, 세계단일화, 종교합일를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고대지혜라고도 불리는 뉴에이지는 오컬트밀교로서 소수의 특수집단이 추구하던 것이었는데, 196
미국에선 D. L. Moody와 근본주의 자들의 역할로 1920년대 초반 까지도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1883년 부터 1887년 까지 ‘나이아가라 예언 사경회’를 열어 보수 성경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향해 다음의 근본주의 5대 교리를 선포하였다.1) 성서무오설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3)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4) 기적의 역사성5) 육체적 부활과 재림1910년부터 1915년 까지 ‘The Fundamentals’라는 소책자 운동을 통하여 근본주의 신학 5대 교리를 변증하는 홍보하면서 근본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4년의 PCUSA의 Auburn 선언은 ‘성서무오설은 해로운 교리’라고 결정하고, 1925년 테네시에서 열린 스콥스 재판
한국교회는 예배에 대한 ‘열성’이 강해서 주일이 아닌데도 예배라는 용어가 남발되어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그리고 심지어 새벽기도회를 예배라 하고 구역예배, 가정예배, 이사예배 등 다양한 예배들을 한다.그런데 과연 이러한 예배 용어의 남발이 바람직한가를 물어본다면 절대 아니고 사실상 이렇게 된 배경에는 ‘예배학’에 대한 무지가 가장 큰 원인이다. 즉 신학대학원에서 ‘예배학’을 전공자 또는 연구자가 아닌 비전공자가 가르치고 한 학기만 형식적으로 가르치기에 올바른 예배학에 대한 이해가 목사후보생들에게 결여된 현실이 가장 큰 문제다.그리고 이 문제는 예배 용어의 문제만이 아니라 ‘예배의 내용’에도 심각하게 문제를 보이는데 바로 ‘성찬식’을 매우 소홀하게 여기고 행하기에 ‘일년에 4번 정도’로 하는 교
글을 시작하며옥성호는 지난 2018년 1월에 출판한 에서 바울이 쓴 서신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복음서마저도 바울의 영향력에 의해 복음서 기자들이 쓴 허구의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옥성호의 와 함께 , 를 빠른 시간 안에 성경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할 예정이다). 옥성호는 이 책에서 복음서가 허구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신약 성경의 여러 곳을 헤집고 다닌다. 예수님의 하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12:17)1)라는 말씀도 옥성호가 신약성경이 허구라고 주장하는 증거들 중 하나이다. 옥성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
회심 전의 죄인들에게는 율법이 그들을 죄의 굴레로 속박하거나 정죄하였으나, 회심 후 즉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더 이상 그들을 족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자유하게 하고 온전하게 한다.그리고 “그 율법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약 1:25)고 하였다. 물론 십자가 사건 이후 의식법(제사법)과 사회법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의식법과 사회법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공의는 우리가 기억하여야 한다.율법의 도덕적 기능인 십계명은 오늘날도 유효하다. 신약시대는 구약시대 보다 더 높은 도덕과 윤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칭의 된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3장의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설교에 있어서 ‘복음적 설교(사실상 주제설교 : 목사가 설교의 주제를 정하고 본문을 선택하는 설교)’를 중심으로 행해졌지만 10년 전부터는 ‘강해설교’가 유행하여 많은 목사들이 전하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아직도 ‘자의적 해석’이 중심이 되기에 구약학자 김지찬도 비판하였다.그렇다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올바른 성경해석이란 역사적으로 검증된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주석 방법으로 해야 하는데 구약학자 김지찬의 지적대로 주석도 제대로 보지 않고 심지어 엉터리 주석을 보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너무 많고 심지어 강해설교자의 메시지를 들어도 아닐 때가 많다.그렇다면 이러한 심각한 문제가 있는 한국교회가 바른 설교를 통하여 ‘바른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해왔던 ‘설교의 형태
글을 시작하며"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을 받으리니" (한글개역 행2:38)위 본문의 개역한글(개역개정) 번역에 의하면, 물세례를 받기 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회개이며, 회개와 물세례가 죄 사함을 얻는 선행 조건인 것처럼 보인다. 특히 ‘그리하면’이라는 번역 때문에 회개와 물세례를 선행 조건으로 하는 죄 사함이 저절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 조건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행 2:38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죄 사함, 성령 세례)을 받기 위해 인간 편에서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본문 등을 근거로 ‘물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고, 사제가 아닌 산파라 할지라도
저는 교인들에 대해서 여러 종류의 많은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에 대해서도 많은 일들을 접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단에 빠진 목사님이 아닌, 일반적인 목사님들은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1. 그리스도를 위한 대꼬쟁이 유형항상 성경적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유익과 영광이 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일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옳다고 동의하는 의사 표현이 분명한 분들입니다. 틀린 일이나 비성경적인 일에는 가담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름도 그런 일에는 연류시키지 않습니다. 주 예수를 위해 옳고 정당한 일에 자신을 드리고 헌신하는 분들입니다. 언제나 성경적인 일에 all in 합니다.그런데 이런 목사님들은 거의 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남자를 먼저 창조 하셨고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창조의 질서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신 것처럼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고전11:3; 고전 11:7-9; 엡5:23). 예수님이 자기의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자는 질그릇 같이 연약한 여자를 그렇게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고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엡 5:21-25).가정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할 때 (관계 속에서 신실할 때) 가정에 질서가 생기는 것이고, 그 질서의 결과는 화평이다. 그리하여 고전 14:32-33을 보면, 예언하는 자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의지로써 스스로 절제하며 질서있게 예언해야 함을 말한
한국교회는 전 세계교회와 다른 독특한 절기와 모임들이 있고 특히 해마다 7월의 첫 주일이 되면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는데 이 절기는 사실상 한국교회만 행하는 것이다.그런데 개혁주의(사실상 칼빈주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문제는 이 절기가 과연 성경적이고 특히 개혁주의 입장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를 보면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1901년의 제1회 장로회 공의회에서 ‘추수감사절’을 공식 절기로 채택하고 그 해의 11월 10일 주일에 지켰고 1906년부터는 두 종류의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11월에는 공식적인 추수감사절 그리고 7월에는 비공식적인 추수감사절을 지킨 것이 나중에는 ‘맥추감사주일’로 불리게 된 것이다.그렇다면 이러한 ‘맥추감사주일’을 성경에서는 ‘맥추절’이고 원래 의미를 보면 자신의 밭에서 거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