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회심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의 강력하신 구령의 행위를 올바로 이해 한다면 오늘날 교회가 무엇에 더욱 집중해야 하고 어떤 요소들을 반드시 교회 안에서 청산해야 하는지가 분명해 진다. 칼빈이나 루터, 쯔빙글리 등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오르간을 악마의 도구라고 혹평하며 성당에 있는 오르간을 철거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감화하심에서 비롯된 진지하고 뜨거운 회심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악기의 사용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인위적인 수단으로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영향을 우려하고 이를 배제하려 했던 것을 볼 수 있다.얼마든지 사람의 감정을 속일 수 있고 인위적으로 감정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이 악기와 음악에 존재하고
마음을 쏟아 기도하지 않고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대면하여 자기를 점검하는날카로운 묵상 없이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은그것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일이든,지극히 영적인 일이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사악한 인간의 생각에 사로잡힐 빌미를 주게 될 뿐이다.신앙의 본질에서 부터 미끄러지고경건의 의무에서부터 해이 해질 때 더욱 풍성해지는 것은사람의 수단과 온갖 술수일 뿐, 혹여라도 그것으로 성장과 감히 부흥을 꿈꾸는 것이라면중대한 착각일 것이다.목회자의 몰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말씀 앞에 자신을 철저히 점검하지 않고 설익은 열매로 타인을 배불리려 할 때,그는 사탄의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며,정직하고 진실하
만약에 소망없는 죄인들이 우리를 구원 해 주실 분을 보내어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했고 간절히 앙망한 결과로 구주께서 오셨다면 마땅히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주의 오심은 불순종의 죄로 인해 영원한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 있던 암흑 속의 진노의 자녀들에게 임한 성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히 여겨주심의 은총의 결과일 따름 입니다.구주의 탄생을 기념할 것을 성경이 어디에서도 명하고 있지 않는 것은 죄인된 우리 편에서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 사건이 이렇게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인지 조차도 알지 못했던 전적으로 무지 했던 자들입니다. 성탄절을 기억하라!고 하셨으면, 바로 이 타락한 시대처럼 그 성탄의 의미를 추악하게 변질시키고야
지성적인 헌신을 통해서 오랜 세월동안 성경의 진리와 유구한 교회사의 유산인 정통 교리 안에서 정교하게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신자들 보다는 감각을 통해서, 이를테면 방언의 은사, 안수, 직통계시 등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고 느끼려는 행태가 한국 교회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개하신 보혜사 성령이 아니라 귀신과 악한 영들에 의한 미혹의 역사들이 성령의 역사로 둔갑된 다양한 비성경적 운동들과 이른바 영성 프로그램들이 교회안으로 침투하여 신앙을 오염시키는 상황이 줄을 잇고 있는 모습이 바로 이 시대의 영적으로 무너지고 표류하고 있는 교회들의 적나라한 영적인 현주소 입니다.이러한 때에 성령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 그리고 곡해 되어진 모든 성령의 역사라는 미명하에 전개되고 있는 여러 심각한
왜 이 시대의 모든 공회는 보다 올바른 교회 운동과 참된 진리 수호에 요구되는 첨예한 진리 혹은 비진리의 문제들을 치열하게 다루지 않는 것인가? 성경과 교리를 펼쳐두고 이에 정초하여 교회가 수용하기 가한 것과 불가한, 이 시대의 여러 기이한 현상들에 대한 거룩한 논쟁과 논의들을 왜 기피하고만 있는 것인가?기독교의 역사는 진리와 비진리, 정통과 이단의 각을 세운 격렬한 논쟁의 역사로 기술되어 왔다. 연합과 일치의 당위를 논하기 보다는 우리는 지금, 과연 유구한 개혁파 신학과 청교도의 신앙에 입각한 올바른 신학과 신앙의 도를 추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향해서 모든 택한 자녀들이 ‘아버지’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렇게 부를 것을 말씀하고 있다. 갓난 아기는 아빠와 엄마를 알아보고 점점 더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제 아빠와 엄마와 관계를 형성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부모에게서 사랑과 신뢰가 충분히 아이에게 전달되고 인식될 때 그 아이는 부모와의 견고한 관계를 바탕으로 건강하게 성장해 나아가게 된다.복음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신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이 복된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에 대해서 풍성하게 진리 안에서 이를 깨닫고 발견하며 경험하는 것을 바탕으로 그 관계가 발전해 나아갈 때 더욱 견고한 신앙이 우리 안에 뿌리 내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고
페이스 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여러분의 영혼의 얼굴까지 모두 은연 중에 드러나는 곳입니다여러분이 '좋아요'를 누르는 그 주제들과 대상들이여러분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좋아해야 할 대상인지를 하나님께서도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지극히 경건한 영적인 주제에도그리고 지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에도 동시에 '좋아요'를 표한다는 것은정확히 말해서 그대의 영혼이한쪽은 그리스도에게한쪽은 세상에 치우쳐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요?신자는 세상과 믿음 사이에서의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양다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마음과 뜻을 주께 고정하십시오!믿음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빼았는많은 세속의 물질적 가치들을 뒤로하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영생의
요한복음 12장에는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진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3절에서 마리아의 등장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이 향유의 가격은 유다의 평가를 참고해 볼 때 300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 이었으니 노동자가 10개월 정도 일을 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의 가치만큼 매우 값비싼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향유는 아마도 마리아가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가운데 단연 최고의 가치가 아니었을까 짐작이 된다.예수님을 위한 잔치였다. 주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