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평소 방향과 논조와는 조금 거리가 먼 내용입니다. 독자님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아는 분이 TV에 출연하여 입상하였으므로 축하드립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에게 신앙의 영역과 이 땅에서 하는 일의 분야에서도 큰 성취가 있기를 바랍니다.
인천 성산교회(고광종 목사)가 올려드리는 성탄절 멧시지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사랑으로 섬기고 교제하며 주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를 2년, 지하 예배당은 앉을 틈 하나 없이 꽉 찼다. 자연스럽게 더 큰 예배당이 필요했고, 성도들의 힘을 모아 보증금 1000만원, 월 85만원의 85평 남짓의 상가 3층을 얻게 되었다. 음부에서 3층천으로 갔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상가에서의 예배는 시작되었다.이곳에서도 성산교회만의 독특한 색깔인 성도간의 말씀교제가 계속되었다. 남자 집사님들은 예배 후에도 한 분도 가시지 않고 3층 구석방에 모여 밤 열두시에서 한시까지 구원간증과 교제를 했다. 이 분위기는 전
선교를 다녀오고, 두 달 쯤 지났는데, 세 군데서 나를 스카웃하기 위해 연락이 왔다. 군포에서는 집사 10여 명이 자기 차를 판돈을 가지고 와서 교회를 개척하자고 했고, 서울에서는 성도 4-5천명 된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오라고 했다. 다른 한곳은 가정집으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성도들이 있는 인천 지역이었다. 그곳은 내가 전도사로 있었을 때 함께 했던 성도들이 있는 곳이며, 후일에 개척 제의가 들어 온 세 곳 중 내가 선택하게 된 곳이다.누군가가 “목사님 목회 성공 요인이 뭡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머뭇거림 없
힘들게 결혼에 성공했지만, 결혼 이후의 삶 또한 평탄치 못했다. 결혼 후에도 나는 한 달에 두 세 번은 내 안의 갈급함을 채우러 기도원에 올라갔다. 그때마다 아내는 가정 중심의 삶을 살기를 원했고, 서로의 의견이 대립된 상태로 목회를 준비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였다.서른 한 살 되던 해 조그만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해 작은 교회의 전도사로 사역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유난히도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로마서 강의가 있는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에는 전도사, 강도사를 비롯하여 은사를 체험하고 주의 종으로 부름받아 하나님의 사역을 하겠
나는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찢어지게'란 말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단어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가난으로 인해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학업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학교 갈 시간에 밖에서 밭을 매야 했고, 들에서는 풀을 베야 했으며, 산에 가서는 나무를 해야만 했다.8남매 중 7째로 태어나 가난의 최전방에서 쌀밥 한번 먹어 보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 말 그대로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내 기억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