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지 못한 경제활동에서 파생 되어진 천박한 자본주의는 유대인들의 탐욕에서 나온 이윤 창출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유대인들은 정직한 이윤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나 구조 속에서 엄청난 이윤을 만들어냈고, 그 속에서는 착취와 수탈이라고 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시장을 확장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많은 돈을 벌 수 없는 시장의 환경 속에서 유대인들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천박한 자본주의라고 하는 용어의 의미이다.세상의 가치관은 이미 이러한 천박한 자본주의를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 임진남 목사 (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한국사회가 중화사상에 물들어 거의 2,000여년 동안 불교, 유교, 선이라고 하는 계급과 신분제도에 의해 변화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에서 찾아 볼수 없는 위대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온 이후 구한말을 지나, 6.25 전쟁을 거쳐 그야말로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축을 이루는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기에 산업근대화에 성공이라고 하는 열망은 교회 안에서도 진정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아주 딱 맞게 강단에서 목사들의 설교로 전파되고 가르쳐 지면서 교회의 눈부
회심준비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의 기능을 통해 인간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나와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회중파 신학의 오류는 칼빈과 어거스틴이 비판하고 있는 자유의지, 즉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의지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바르게 알지 못한 결과에서 나온 비성경적 주장이다.어거스틴이 정죄한 팰라기우스와 칼빈이 정죄한 피기우스 그리고 개혁교회가 정죄한 아르미니우스의 한결 같은 주장은 타락한 인간에게 어느 정도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고 하는 사상이다. 그러나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교부들의 신학을 연구하였던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성경의 빛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교부들은 속사도들과 변증가들 그리고 사도들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었는지를 찾기 위해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문을 열고 자신들만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모든 교부가 성경의 가르침에 합당한 진리의 빛을 다 찾은 것은 아니다. 때론 그 길에서 바른길이 아닌 샛길로 걸어간 교부들도 있었다. 하지만 교부들의 신앙은 위대하였고, 그 작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항상 칭송받고 있다. 위대한 교부인 어거스틴은 자신의 신학적 견해가 성
- 임진남 목사(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필자는 코리넬리스 프롱코의 도르트 신조 강해에 대한 책에서 상당 부분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책에서 한가지 주목할 만한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회중교회 신학자인 프롱크가 아담에 대한 알미니안들의 신학을 언급한 내용이다. "아담은 의로운 상태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 아니며 오히려 무흠한 상태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담은 선과 악의 중간 상태에 있었고 중립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1) 알미니안들이 하나님이 아담을 선과 악의 중간 상태로 창
오늘날 현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미신적인 신앙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제단이 아직도 있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토속적 신앙을 통해 제단에서 제사를 드렸던 그것과 같이 교회 안에서 설교하는 강단이 마치 제단인 것처럼 그렇게 믿고 있는 분들이 있다. 간혹 어떤 분은 설교하는 강단을 함부로 올라가는 것은 제단을 더럽히는 행위라고 여긴다. 그래서 예전에는 강단에 아무나 올라오지 못하고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이나 신령한 분만 강단에 올라와 청소도 하고 물건을 만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설교하는 강단이 마치 어
-임진남 목사 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과거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그 내용은 모든 세상 나라 가운데서 구원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 계시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기준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인간의 모순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왜곡되어 가르쳐지고 있다. 그중에 가장 어리석게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
능동순종주의자들이 예수님께서 모세의 모든 율법 조문에 순종하여 율법의 의를 획득하여 영생을 얻었다고 하는 능동적 순종 신학의 성경적 근거를 롬 5:14-19로 삼는다. 특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이 말씀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학적 교리를 형성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성경 말씀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도 바울이 기록하였는지에 대한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을 살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청교도
최근 능동순종에 대한 이슈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아담의 창조시에 대한 인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언급하며 아담의 가변적 상태를 주장하는 신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아담의 상태에 대해 칼빈의 신학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과연 칼빈에게 태초의 아담은 가변적 존재인가? 아니면 영생으로 창조된 완전한 탁월성을 가진 존재인가?이 글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 15장을 기반으로 요약하여 기술한 것이다. 먼저, 칼빈은 인간이 자신 스스로에 대한 지식을 가질 때 두 가지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장로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사상이라고 우리는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이 나타나는 현장은 성도들의 모든 삶이지만, 그 가운데 성도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께서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아 타락한 로마교회의 예전을 과감하게 버리고 예전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드러나기를 아주 심사숙고하여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의 순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물론 오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없는, 교회성장과 인간의 감정만을 주장하는 예전(liturgy)에 함몰되어 버린 목회자들의 수준의 한계를 볼 때 장로교회가 과연 한국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한국교회 안에 광풍으로 불고 있는 은사주의 은동은 여전히 그 기세를 잃지 않고 계속 목사들과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한국교회 안에 성령운동이 일어나기 전 장로교회는 그야말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였고, 목사들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그들의 도덕적인 수준은 그야말로 부끄러움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성도들 앞에서 당당하였으
존 머레이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로 핫지와 워필드의 전통을 이어 받은 학자로 불린다. 존 머레이가 웨민의 신학 교수로 부임한 후 메이첸과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에 대한 논쟁을 할 때, 존 머레이는 예수님의 순종을 능동, 수동으로 나누면 안 된다고 하였다. 존 머레이는 예수님의 순종의 모든 결과는 결국 십자가의 구속을 향한 순종으로 나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순종을 기계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 하였다.또한 존 머레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행위에 의해 사람을 창조하고 언약을 제정하였다고 해석하는데 이것을 경륜이라고 말한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용어는 없다. 오직 언약의 보증(히7:22)이시며 언약의 중보자(히8:6, 히9:15, 히12:24)라고 하는 말씀만 있다.종교개혁자 칼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한 영생의 삶에 대한 묵상을 매순간마다 해야 한다고 했다. 칼빈이 스콜라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칼빈이 영혼의 감옥이 육체라고 하였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칼빈의 그런 가르침은 우리가 나그네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므로 땅의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에서 가르친 것이다.그런데
엄밀히 말해 개혁주의란 말은 종교 개혁주의자들이 사용한 용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후대의 산물이다. 개혁이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교회의 타락한 신학의 교리에서 바른 성경해석을 위한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했다.결국 reformed church(개혁된 교회)라고 하는 용어는 과거 종교개혁 당시 만들어진 교회의 모습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개혁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거나 실제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할 때, 중세시대 종교개혁 시
최근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능동순종에 대한 논쟁에 쏠려 있는 일부 목사들과 신학 교수들의 모습은 가히 제정신이 아닌 모습들을 보여준다. 마치 능동순종이 성경에서 확고하게 선포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목소리를 외치고 있다. 이제는 급기야 비아냥 거리고 마치 웨민의 신앙고백서를 부인하는 사람들로 치부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 이유는 뭔가를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능동순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아주 독선적이고 자신들만 의로운 사람들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 임진남 목사 (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 )현대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을 부정하거나 약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때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사역이 나타날 때, 그것을 인정하는 신학적 동의는 어느 정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분은 하나님으로 오셨다고 하는 아주 짧고 간단 명료한 이 진리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눅1:35).이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
제 9문. 신격에는 몇 위가 계십니까?답. 신격에는 삼위가 계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시니, 이 삼위는 한 분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본체도 하나이십니다. 그리고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위격적 특징에 있어서만 구별됩니다 (요일5:7, 마3:16-17, 마28:19, 고후13:4, 요10:20).제 10문. 삼위 안에 있는 인격적 속성은 무엇입니까?답.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시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낳은바 되셨으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영원 전부터 나오십니다. 이름과 속성과 사역과 예배를 아들과 성
궤변주의자들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러한 증거들은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나타났고,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 그 한계를 벗어나면 교회 공동체가 당시에는 혼란과 다툼으로 마치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사랑의 덕목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성경의 가르침이 확고하게 서서 그 진리의 등불을 선명하게 밝혀주었다.역사적으로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한 인격 두 본성에 대한 기독론 논쟁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이신칭의, 성자의 동정녀 탄생, 그리고 성경의 무오성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하는 것
현금에 한국교회 안에서 야기되는 일부 신학적 교리문제들, 즉 '능동순종', '회심준비론', '행위언약' 등에 대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태도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가르쳤던 내용들을 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세이다. 일부 신학교 교수들의 가르침을 매우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것 같으나 단 한 번도 성경에 근거하려 바르게 연구되지 않았다. 그저 '누가', 아니면 '어떤 신앙고백서'에서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삼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경을 배격하고 있었다.아래에 기록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그
제8문.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있습니까?답. 살아계시고 참되신 분은 오직 한 분만 계십니다 (신6:4, 고전8:4-6, 렘10:10-12). 세상의 신들은 거짓이다.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단번에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열 번의 재앙을 애굽에 내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이라고 하는 세상을 대표하는 나라 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