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며한글로 번역되어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은 개역개정, 한글개역,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 여럿 있다. 이들 중에서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번역 성경은 아마도 한글개역을 개정한 개역개정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개역개정이 다른 번역 성경들에 비해 오역이 가장 많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에게는 개역개정이 나온다는 소식에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대가 컸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정작 필자가 개역개정을 손에 들었을 때, 가슴이 터질 정도로 실망이 더욱 컸었던 기억
글을 시작하며정윤석 기자는 자신의 Facebook에, ‘웨민고백서’라 할지라도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과감하게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정이철 목사의 글에 대해 어쭙잖은 비판 글을 올렸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전략)......합동측 목사님들은 정이철 목사의 논리대로라면 심각한 쥐약의 원리를 담은 위험한 원리를 기초로 신앙고백을 하고 순종한다는 얘기가 돼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능멸도 이런 능멸이 없다” (정윤석).이 글은 마치 1514년 종교개혁 당시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무오한 진리라고 믿었던 로마 교황의 교서와 가
글을 시작하며신약성경의 번역자들은 헬라어 원문에서 지시 대명사나 인칭 대명사를 번역할 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의역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12:16).위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로 번역된 헬라어 “λέγει”(레게이)는 “말하다(say)”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λέγω”(레고)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이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그가 말씀하신다.”인데, ‘개역개정’에서는 ‘3인칭 대명사’ “그
글을 시작하며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농부의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마21:33-46; 막12:1-12; 눅20:9-19). 그런데 문제는 이 비유의 내용 중에 막12:8(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의 진술이 마21: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과 눅20: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의 진술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21:39과 눅20:15에서는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어 쫓아 포도원
글을 시작하며“겨자씨 비유”에 대한 필자의 글이 에 게재된 뒤에 많은(?) 분들에게 고맙다는 격려를 받았다. 물론 여기서 많다는 말은 이전의 다른 글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또 한 편, 비판과 야유도 이전 글들에 비해서 더 많이 받았다. 필자는 “겨자씨 비유”에 대해 비판과 야유를 보낸 이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오래 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을 이름도 없는 필자의 주장으로 인해 포기하는 것은 그렇게 용이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비판
글을 시작하며신학은 사유하는 학문이 아니라 발견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은 성경을 근거로 인간의 생각을 개진하는 학문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신학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사상들이 버젓이, 또는 교묘하게 진리 노릇을 하고 있다.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능동순종 교리”일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능동순종 교리를 비판하면서, 이 주장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되는 웨신서
글을 시작하며마13:31-33과 눅13:18-21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나 나중에는 큰 겨자 나무에 새들이 깃들만큼 창대해진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며,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이에 대해 이동원 목사와 찰스 스윈돌 목사는 아래와 같은 예를 들었다(본 글 에서는 “겨자씨 비유”에 대해서만 다루고, “누룩 비유”는 다음 에서 다룰 것이다).“12명의 제자들, 머
들어가는 말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고 알고 있다. 필자도 신학교에서, 복음서는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용한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고 배웠고, 지금도 대부분의 학자들과 주석서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는 아람어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물며 백과사전에서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이 언어(아람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소개하고 있다.그러나 11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중동 전문가 류모세 선교사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며, 예수님
글을 시작하며2021년 11월 16일 [기독교포털뉴스]에 “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라는 제목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제 33회 정암신학강좌서 김병훈·박상봉·이승구 교수 재천명”이라는 소제목으로 ‘하나님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능동순종과 수동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김병훈, 박상봉, 이승구 교수의 강의를 정윤석 기자에 의해 요약 보도되었다.물론 필자는 이 강의들을 듣지 못했다. 그러므로 [기독교포털뉴스]에 실린 요약 기사만 가지고 “그리스도의 능·수동 순종을 통한 칭의는 개혁파 정통 교리”라고 주장
글을 시작하며하나님이 아담에게 처음 주신 생명이 마치 영생이 아닌 것처럼 묘사된 “사람과 맺으신 첫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는데, 거기에서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의 웨신서 7장 2항은 매우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처음 주신 생명은 영원한 생명(영생)이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웨신서 7장 2항의 이 오류를 눈치 채지 못하고 방치함으로써, ‘능동순종’과 같은 터무니없는 돌연변이 교리가 김병훈, 방상봉, 이승구 교수 등에 의
글을 시작하며라는 제목의 필자의 글이 [바른믿음] 사이트에 게재된 뒤, 이 글을 읽은 몇 몇 분들의 질문이 있었다. 아마도 이 분들은 필자의 글 서론에 잠깐 언급된 마8:22의 “죽은 자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에 동의할 수 없어서 필자에게 질문한 것 같다. 이 분들의 질문은 하나같이 마8:22의 “죽은 자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라고 하는 항의성 짙은 의문이었다. 물론 필자는 이 분들의 의아함을 충분히
글을 시작하며“나사로가 병 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11:6)마르다는 심부름꾼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라비 나사로가 병 들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 들었다(아마도 위급한 상태의 중병이었을 것이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틀을 더 지체하시고 나서 베다니로 떠나신 것을 두고,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는 견해(21세기 신학자들 중 일부, 예를
글을 시작하며이국진 목사는 [5.3 유니아라는 여자 사도]라는 자신의 소논문에서 제목에서처럼 유나아가 여사도라고 주장한다. 그가 유나아를 여사도라고 주장하는 근거들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롬16:7(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에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eivsin evpi,shmoi evn toi/j avposto,loij/에이신 에피세모이 엔 토이스 아포스톨로이스)가 통상적인 번역처럼 “그들은 사도들 사
글을 시작하며성경을 원문대로, 즉 저자의 의도대로 바르게 해석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기록만 해도, 현재와는 약 2000년의 엄청난 시간적 간격이 있으며, 또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고대 언어인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고, 더구나 그 기록들은 당시의 고대인들, 복음서는 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삶의 정황, 즉 그들의 관습이나 환경 등이 녹아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이런 난관들을 염두에 두고 원문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을 원문대로, 즉 저자의 의도대로 바르게 해석하
글을 시작하며김병훈 교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피스카토르(Johannes Piscator, 1546-1625) – 논점 정리”의 내용을 요약, 발췌한 글에서 자신의 능동순종 주장이 지극히 성경적임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만 놓고 본다면, 어쩌면 성경이 능동순종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필자의 눈에는 조금도 능동순종을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분명하고 객관적인 성경의 지지 없이 김병훈 교수가 진술한 것처럼 “로마서 5:
들어가는 말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는 일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역된 성경 본문 까닭에 이단적인 교리들이 생산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단적인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오역된 성경 본문 까닭에 그것이 이단적인 위험한 교리임을 모르고 수용하며 가르치는 경우들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물론 번역에는 한계가 있다.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보여주듯 번역은 결코 원문의 의미를 100% 반영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번역만큼은 원문에 가장 가깝도록 정밀하게 번역하려고 애써야 한
글을 시작하며“능동순종” 주장자들은 예수님이 율법에 대한 “능동순종”으로 의를 획득하여 자신을 의롭게 하고 죄인들에게 그 의를 전가시켰으며, 또한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수동순종”으로 죄인들의 죄책을 면제해 주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정이절 목사가 주장하는 바처럼,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의 방식은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성경 구절은 성경 도처에 널려 있지만(그래서 필자는 ‘십자가’뿐임을 말하는 성경 구절들을 소개하려고 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밤을 새워도 안 될 것 같아서다.), “능동순종”을 뒷받침하는 성경
글을 시작하며“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뒤이어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눅10:38-42)를 읽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육적인 일’(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 만드는 일)보다 ‘영적인 일’(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일임을 교훈한다고 생각한다. 또 예수님도 육신적으로 자신을 대접하는 것보다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라고 생각한다. 아래 소개하는 주석이 이런 생각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당연히 음식 준비와 환대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
글을 시작하며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마6:12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마치 우리가 다른 이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제자들에게 신성모독을 부추기는 가르침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글을 시작하며어느 날 예수님은 수가 동네의 한 우물가에서 낯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부탁했고, 그녀는 예수님의 부탁을 거절한다. 이때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자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라고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