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로, 쯔빙글리에게서 제일 안타까운 것이 그의 성찬관이다. 물론 오랫동안 널리 오해된 것과는 달리 쯔빙글리의 이해에도 칼빈 등이 후에 논의하는 영적 임재설에 해당하는 내용이 암묵리에 들어 있다는 것이 이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고, 쯔빙글리의 표현 방식은 그의 후계자요 동료인 불링거의 표현 보다는 좀 오해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루터와 쯔빙글리가 그들의 생애 중에 유일하게 한 번 만났던” 말부르크 회담(the Marburg Colloquy, 1529년 10월 1일-4일)이
(쯔빙글리의) 또 하나 큰 기여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 14:26-32 말씀에서 유래한 소위 “예언”(Prophezei, prophesying) 모임의 시도였다. 이는 새로운 예언을 받거나 듣기 위한 모임이 아니다. 쯔빙글리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것도 우리 자신에서부터 더하고 또 우리 자신의 뻔뻔함으로 인해서 어떤 것도 거기서 빼면 안 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가감(加減)하는 것이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자들의 심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씀에서
넷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 건물을 둘러보았을 때, 앞자리에 있는 십자가에 예수의 상(像)을 비롯해서 수많은 상(像)들이 예배당 안 밖에 있음을 보고서, 그것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그 앞에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조항을 위반한 것이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설교자 쯔빙글리와 그 말씀을 듣고서 성도들과 온 시 전체가 우리에게 잘못된 것이 있음을 깨닫고 고치는 일들이 있게 된 것은 말씀에 의해 교회 공동체가 개혁된 매우 가시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예다. 여기 중요한 세 사람들이 있다.
셋째로, 쯔빙글리는 그가 그 제목으로 유명해진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1525년 3월)를 구별하여 제시하는 일의 선구자였고, 이로써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종교라는 말은 모든 개혁자들이 그 말을 그런 의도로 사용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 경건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나는 ‘종교’라는 말로 기독교인들의 경건 전체를 이해하는 데, 곧 신앙, 삶의 방식, 명령, 예배 질서, 성례전을 말한다.” 그러므로 ‘종교’라고 할 때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이 세상의 여러 종교를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쯔빙글리의 둘째 기여는 역시 자국어로 하는 예배의 시도와 그 정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매우 자명한 것이 중세 유럽 교회에서는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니었다. 중세 유럽 교회들은 어디서나 라틴어로 예배하였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여겨졌다. 예배에 참여하는 민중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안 되었고, 또 민중 편에서도 그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것으로 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고 심지어 영적인 것이어서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여겼다.이는 잘못된 전통이 낳은 잘못된 전통의 고착화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츠빙글리의 연속적 성경 읽기와 강해(lectio continua)의 회복개혁파 교회에 대한 쯔빙글리의 첫째 기여는 역시 성경에로 가고, 처음 신약 교회의 모습에로 다시 돌아 간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성경을 연속적으로 읽고 강해하던 그 처음 모습을 회복한 것이다. 이 일은 1세기 신약 교회가 그 예배를 시작할 때 아마도 그에 근거하여,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예배 개혁을 시도했던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의 전통과도 관련될 것이다. 매주 토라와 선지서의 상당 부분을 연속해서 읽던 회당 예배의 전통을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개혁하면서 처음 신약 교회는 구약과 함께 사도들의 글들도 같이 읽어 가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구약과 신약으로 확정된 책들을 계속해서 읽으면서 그것을 강해하는
스위스의 종교개혁, 특히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寡言)이 아니다. 취리히를 비롯하여 루체른(Oswald Myconius, 1488–1552), 바젤(Myconius, 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 베른(Berchtold Haller, c. 1492-1536), 제네바(Farel, Viret, Calvin 등), 그리고 조금 밖에 있는 스트라스부르(Wolfgang Capito, c. 1478–1541, Martin Bucer, 1491–1551) 등 각 도시들이 이룬 종교 개혁의 성과는 놀랍다.후에는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스위스 연방들(the Swiss Confederation)이 함
율법(律法)이란 무엇인가? 율법은 십계명인가? 구약시대에 십계명이 전부인가?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기술된 뒤에 다른 법례들이 수 없이 계시로 제정되었고, 레위기에서는 의식법, 사회법, 재판법 등이 제정되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 외에도 선지자들이 받은 계시도 율법에 포함된다.율법(Law)이란 무엇일까?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번역하면서 Law 번역이 쉽지 않음을 느꼈다. “범죄 이전의 법”, “범죄 이후의 법(율법)”, “오순절 성령 이후의 각 국가법”이 현격하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Law를 어떻게 이해하며 사용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Law는 크게 세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Law를 한 단어 ‘율법’으로 통일해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서양은 아직도 기독교
서요한 박사의 『언약사상사』(187-192)에서 “엄숙 동맹과 계약의 내용과 신학”에 대해서 제시했다.(참고. ‘covenant’는 계약, 언약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우리는 ‘언약’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서 박사는 ‘계약’으로 번역했다. 박사논문 제목 “The Contribution of Scottish Covenant Thought to the Discussions of the Westminster Assembly 1643-1648 and its Continuing Significance to the Marrow Controversy 1717-1723”(Glamorgan Univ, 1993년), 브리티쉬도서관 선정도서(British Library, www.bl.uk)).엄숙 동맹과 언약(1643)
신조(信條)는 영, Creed, 라, Credo(Credomus)에 대한 번역이다. 신조는 증표, 상징이라는 의미로서 영, Symbol, 라 Symbolum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신조는 신경(信經)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도신조’보다 ‘신도신경’이라는 용어를 더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니케아 신조 혹은 니케아 신경으로 사용한다. 신조는 교리와 동의어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교리보다 신앙고백이라고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교리가 결정되기 전부터 있었던 문장이기 때문이다.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다. 기독교 교리는 삼위일체(동일실체, homoouison)과 그리스도 양성교리(theotokos, Dei Genetri
1625년 3월 27일, 제임스 1세 사후(死後),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Ⅰ, 1600/재위1625-1649)가 왕좌에 즉위했다. 우리는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부터 장로교를 거부하고 박해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1603년 잉글랜드 제임스 I세로 통합왕이 되었을 때도 그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천인청원(Millenary Petition, 1603년)에 의해서 진행한 흠정(欽定) 성경 번역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1625년에 즉위한 찰스 1세는 15살의 프랑스 앙리 4세(Henri IV, 1553-1610)의 딸, 로마교회 신자인 앙리에트 마리(Henrietta Maria of France, 1609-1669)와 6월 13일에 혼인했다. 마리는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될 때, 두
신학(神學)은 무엇이고 누가하는 것일까?신학이 1세기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신학(theologia)”이라는 용어는 12세기에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00-1160)의 명제집(Libri Quattuor Sententiarum)에서 등장했다. 신학은 전문 직종에서 파생한 용어로 보아야 한다. 그 이전에 논쟁은 교리 논쟁으로 교회 사역자들이 교회 현장에서 교회 이룸의 과정이었다.신학이 형성되면서 신학 자체 논쟁이 시작되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리 논쟁에서는 대주교가 주도권을 갖고 있었는데, 신학 논쟁에서는 탁월한 연구자가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대주교는 성도들의 지지로 유지되었는데, 4세기 아타나시우스는 황제에게 미움을 받아 수 없이 유배와
1581년 제임스 6세가 성년이 되자, 1560년에 채택한 신앙고백서 지지를 선언하는 왕의 언약(King's Covenant)에 서명했다. 제임스 6세의 유년 가정교사는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 1506-1582)이었지만, 합당한 기독교적 가치가 아닌 세속 왕의 권위를 앞세웠다.앤드류 멜빌은 두 왕국 체계를 확립했다. 두 왕국 이론이 무엇인지는 1582년 멜빌 목사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후에 잉글랜드 제임스 1세)에게 주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를 간섭하는 왕을 향해서 멜빌이 한 말이다.“전하, 이 말을 꼭 해야 하겠습니다. 이 스코틀랜드에는 두 왕과 두 왕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임스 왕과 국가이며, 다른 하나는 왕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교회
페리 밀러(Perry Gilbert Eddy Miller, 1905-1963)와 리차드 멀러(Richard A. Muller, 1948-)는 미국 학자들이다. 두 사람이 규정한 학문 카테고리가 한국 교회에 교회사를 이해하는 두 진영을 만들었다. 밀러 테제(Miller Thesis)와 멀러 테제(Muller Thesis)이다.유럽 학자들도 두 테제로 묶을 수 있다. 테제에 따라서 학문의 이해가 동일한 패턴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학문은 전제와 결과가 일치해야 정상이고, 일치하지 않을 때 왜 일치하지 않는지 설명해야 한다. 밀러 테제(Miller Thesis)와 멀러 테제(Muller Thesis)로 17-18세기 교회 신학을 볼 때 전혀 다른 가치를 창출한다. 두 테제의 공통점은 루터와 칼빈을 지지하지
154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1517년 이후에 양립되는 두 세력을 화의하기 위해서 레겐스부르크에서 제국 회의(Diet of Regensburg)를 개최했다. 레겐스부르크는 16세기 유대인이 많이 거주했던 대표적인 지역이기도 했다. 이 회의에는 스트라스부르크의 마틴 부처가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칼빈을 동행해서 참가했다.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이중칭의(double justification)로 화의했다. 그러나 교황도 루터(M. Luther, 1483-1546)도 만족하지 못해 결국 와해되어 마지막 종교회의가 되었다.레겐스부르크 화의에서 이중칭의를 결의했지만, 좀 더 구체적인 부분까지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황이나 루터가 모두 만족할 수 없었다. 이중칭의는 전가된 외적 의(an imputed e
황준호의 블러그 2019년 0502에서 소개한 “준비론? 죄의 각성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 율법이 신자에게 필요한가? 회개가 믿음에 앞서 필요한가?”에 대한 단상이다. 나는 왜 황준호의 블러그의 글에 대한 단상(斷想)을 소개하는가? 황준호 씨는 한국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황준호 씨의 이력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목사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고, 몇 신학 저술을 번역한 번역자로 알고 있다.첫째, 황준호의 “준비론? 죄의 각성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 율법이 신자에게 필요한가? 회개가 믿음에 앞서 필요한가?”는 제목에서 제시한 의문에 대한 답변이 없는 글이다. 제목에서 이것에 대해서 명료하게 답할 줄 알았는데, 자신이 제시한 의문에 대해서 잘 파악하기 어렵다. 주요
아래의 글은 칼빈 주석(5권)에 있는 레위기 18:5에 관한 주해인데, 성서연구원 번역의 글을 그대로 옮겼다(색과 굵은 글은 필자가 첨가했다). 좀 더 정교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는 크리스찬다이제스트의 번역이 완역되어 좀 더 좋은 이해를 갖게 해주길 기대한다. 이 글은 황준호 씨의 블로그에서 칼빈의 글을 인용하면서 한 주장(율법을 지켜 의를 획득함)에 대한 비교를 위한 것이다."레 18장 5절 .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결혼에 있어서 정숙해야지 이방인들의 근친상간적인 타락에 빠지지 않도록 권고하는 자리에서 이 귀절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것은 훌륭한 귀절이요 여기에는 일반적인 교훈이 담겨 있는 만큼, 바울은 여기에 입각해서 율법의 의에 대한 그의 정의를 내리
'Helvetic'(헬베틱)은 스위스(Switzerland)의 라틴 이름이다. 'Helvetian'은 '스위스 사람'이란 뜻으로, 로마 교회(사보이 공작령)에서 독립한 스위스 개신교를 의미한다. 프랑스 개신교는 '위그노'이고, 신성로마제국의 개신교는 '루터파' 혹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이고, 영국의 개신교는 '청교도'(Puritan)이었다. 스위스에서 츠빙글리파(불링거)와 칼빈이 교회개혁 운동에 주도적이었는데, 두 사람이 연합함으로 스위스 칸톤들의 교회가 '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로 한 교회를 이루었다.'제 1 헬베틱 신앙고백서'는 '제 2 바젤 신앙고백서'인데, 1536년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가 적성했고, 마틴 부처(Martin Bu
스코틀랜드 교회가 장로교 체계를 도입한 것은 1570년 말이다. 그 이전에 주교와 시찰감독(superintendent)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156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자기 교회를 가장 잘 개혁된 교회(the Best Reformed Church)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1)1558년 말, 스코틀랜드에서 광범위한 개혁운동이 발생했고, 그때 존 낙스(John Knox, 1515-1572)는 제네바에 있었다. 개혁운동을 전개하던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에서 존 낙스의 흔적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낙스는 1547년 세인트 앤드류의 설교
[56] 17세기 이미 개혁신학을 침식하고 파괴시킬 원리들이 현존해 있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파와 칼빈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문주의(로마 교회에 지적이고 심미적 원리로 반대함)와 재세례파, 소니누스파(세르베투스의 후계자들)가 있었다.재세례파와 소시누스파는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개혁교회와 신학에 항상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종교에서 신비적 요소와 합리적 요소를 대변했다. 소시누스주의는 로마교회가 자연과 은혜를 분리하는 체계에 갇혀서, 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주창했다. 인간은 신 앞에서 죽을 존재밖에 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도 한 선지자에 불과했다(260쪽). 재세례파도 자연과 초자연이 평행하다. 소시누스파는 자연 때문에 은혜를 버렸고, 재세례파는 자연을 은혜에 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