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4 03:25 (목)
독자마당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습니까?
icon 옳은 믿음
icon 2021-01-18 20: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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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친절하게 권면을 드렸건만, 아직도 깨닫지 못하셨습니까? 저뿐입니까? 또 얼마나 많은 분이 목사님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귀가 어두워 듣지를 못하십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로 목사님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우리 믿음의 선조들을 다 이단으로 몰아세우는 그 악한 말은 목사님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목사님 마음에 악이 가득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한 말씀도 깨닫지를 못하십니까? 그렇게 성경, 성경을 외치시더니, 왜 성경의 단 한 말씀도 깨닫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정녕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목사님 발밑에 지옥불이 이글거립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 그렇게 끊임없이 악한 열매를 맺으시면, 주께서 언제 뿌리를 찍어 불에 던지실지 모릅니다. 두려워하십시오. 회개하시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십시오.

목사님이 하시는 일은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이것이 지금 목사님이 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목사님과 목사님을 따르는 분들을 보면, 곧 참 성도들을 핍박하고 내쫓으며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할 날이 멀지 않아 보입니다. 아니, 지금도 우리 믿음의 선조들을 다 이단이라며 내쫓고 계시지 않습니까?

목사님이 하시는 그 수많은 정죄의 말이 바로 목사님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십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목사님은 지금 많은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세우시지만, 가장 이단 같은 사람은 바로 목사님 자신이십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3-5)? 언제까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시겠습니까? 언제까지 많은 사람의 권고를 무시하시렵니까? 성경을 펴놓고, 성령님께 이 말씀들을 정말로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같은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능동 순종이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시는 많은 분들도, 제발 그 악한 발걸음을 돌이키시고, 이곳에 발길을 끊으십시오. 여러분의 발이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얼마나 빠른지 깨달으십시오(잠 1:6). 여러분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말씀을 진실로 깨닫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2021-01-18 20: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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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2021-01-29 13:04:34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

본문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의 교리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총회의 입장을 나타낸다. 여기서 명백하게 선언되고, 성경적으로 유효한 중대한 진리에 대한 설명이 오순절 운동에 의미 있는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설립 당시부터 성령세례를 중생의 체험 후에 일어나며 중생과는 다른 경험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또한 성령세례의 초기의 외적 증거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임을 인정해 왔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제 8항)은 그 헌법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포함하고 있다.

신자의 성령세례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초기의 외적인 표적에 의해서 증거된다.(행2:4) 이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방언의 은사와 같지만(고전12:4-10,28) 목적과 사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이 성명은 1916년 채택된 이래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시간과 경과와 함께 각 세대의 평가로서 하나님의 성회는 이것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입장임을 보아 왔다. 다음과 같은 용어의 정의와 성경의 고찰은 우리가 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라고 믿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용어설명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에 대한 교리를 생각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의 테두리 안에서 여러 가지 표현이 사용될 것이다.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취한 것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말하였다. 그의 지상사역을 마치실 때 예수께서 요한의 말을 언급하셨다.(행1:5)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였다. (행11:16)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며, 중생과는 구별된다. 성경은 성령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과(고전12:13),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세례를 주는 경험이 있음을(마3:11)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같은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를 베푸는 집행자와 수세자가 세례로 들어가는 요소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어부 2021-01-29 13:04:03
그 경험의 독특성은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다.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가 한 예이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 밖에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한 후에(행19:3), 바울은 그들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제자들은 물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바울이 그들 위에 손을 얹었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다. 이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 사이의 시간 경과는 짧은 것이었으나 그들이 물로 세례를 받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성령세례는 구원 후에 일어나며 구원과 구별되는 것이다.

성령세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된다. 신자에 대한 성경적인 이상은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성령세례는 신자에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경험하도록 인도하는 위기경험(crisis experience)이다.

성령세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라는 표현은 성령이 채우는 능력으로 임하는 최초의 외적 표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한 결과 신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외적인 표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증거는 항상 신자가 성령으로 세례받을 때 일어나는 것이지 어떤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행10:44-48)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그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했을 때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게 나타났던 증거를 말하였다. 그는 왜 이방인 신자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주선했는지에 대한 이유로 이것을 말하였다.(행11:15-17)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최초의 증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과거 경험의 증거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각 신자가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을 가질 때와 방언 통역을 동반한 회중의 모임에서 계속적으로 풍성함을 더해준다.

어부 2021-01-29 13:03:32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그들이 배우지 못한 언어로 말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데 사람이나 천사의 실질적인 언어이다.(고전13:1) 이 단어를 생각하거나 도취도니 소리로 번역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방언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신자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빈센트(M.R. Vincent)가 관찰한 바와 같이 “특별한 단어이며 기적적인 충격 아래서 명백하고 큰 발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스트롱(James Strong)은 이 단어가 단순히 똑똑하게 발음하는 것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능력은 감정이 올라간 상태나 단어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를 흉내낸 결과도 아니다. 이와 반대로 방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성령이 주시려는 발성의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신자는 성령의 초자연적이며 자극을 주는 능력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며, 성령이 발성을 주시는 대로 말해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하기 위한 어떤 인위적인 기교도 성서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방언을 최초의 외적 증거로 믿는 이유 사도행전을 보면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받는 경우가 다섯 차례 기록되었다. 이중 세 경우는 상세히 다루고 있으나 다른 두 경우는 상세히 기술되지 않았다.

상세히 다룬 경우를 보면 바람의 소리나 불의 혀 같은 것이나 예언 혹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상세히 묘사된 각각의 경우에 모두 나타나는 유일한 현상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0장, 19장의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성경적인 경험이 묘사될 때마다 이 경험과 현상과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람의 소리와 불의 혀가 선행되고 그리고 제자들의 경험이 나타났던 것을 또한 유의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처음의 성령이 부어주신 사건 후에도 반복되었다고 가리킬만한 것은 없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뒤따랐으며 이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직접적인 결과였고 오순절날 이후에도 계속하여 나타났다.

어부 2021-01-29 13:03:07
상세한 것이 나타나지 않은 두 경우의 상황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들의 경험에 동반된 것 같이 보인다. 사마리아의 마술사였던 시몬은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가리키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행8:18,19) 만일 그 경험이 동반하는 표적이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되었다면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된 세 경우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시몬이 보고 들은 것은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논리성이 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개한 후 사울이 그의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함 받도록 하기 위하여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를 주께서 보내셨다.(행9:17) 시력이 회복된 것은 묘사되고 있지만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함 받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9장에서 더 이상 언급이 없다. 그러나 고전14:18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증거하였다. 바울이 언젠가 방언을 시작했을 것이므로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상세히 다룬 그 사건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과 동반할 뿐 아니라,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세례의 초기 증거로 인정하였다. 베드로와 및 그와 함께 한 사람들도 고넬료의 집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연유는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행10:45,46) 이 증거를 근거로 베드로는 편견을 버리고 이 회심자들에게 물세례를 주도록 하였다. 베드로에게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고넬료의 집에 성령의 부어주심에 대한 증거였다.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 사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및 형제들과 토론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그가 본 현상을 언급하였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막겠느냐”(행11:17)고 하였다. 사도들과 형제들이 방언을 성령세례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인 것을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행11:18)고 하였다.

고려할 질문들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에 관하여 여러 질문이 제기되었다.
다음은 그 중에 자주 제기되는 것들이다.

어부 2021-01-29 13:02:26
1. 사도행전은 역사를 위한 책인가 아니면 신학을 위한 책인가? 그리고 교리가 선언적인 서술 이하의 것을 근거로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는 성경 자체가 대답하고 있다. 성경은 바울로 하여금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셨는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된 것으로 교훈(교리)...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기록하기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라고 하였다.
교리는 성경에서 고립된 몇 구절을 근거로 하면 안된다. 오히려 내용이 풍부하게 함축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선언적인 서울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비교한 것에 근거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같이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의 교리는 이 주제에 관계되는 풍부한 성경말씀을 근거로 한다.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방언을 성령 충만함 받은 증거로 인정하였을 때 이 모형을 근거로 교리화한 것은 명확한 것이다.(행10,11장) 양적으로나 횟수에 있어서 이 주제의 무게는 교리화를 위한 견고한 근거를 제공한다.

2.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도시대에만 속한 형상인가?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였는가(고전13:8)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사도시대나 혹은 신약의 정경이 완성될 때까지만 존재할 것이라는 암시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바울이 방언이 그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또한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암시하였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 그는 또한 방언이 그칠 때 지식과 예언 같은 것들도 동시에 현저하게 변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새 방언으로 말하며”(막16:17)가 그대로 적용된다.

3. 바울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12:30)고 했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의문(rhetorical question)이 아닌가?
바울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방언 말하는 것의 여러 가지 기능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세례에 대한 최초의 증거 역할을 한다.
(행10:46, 11:15) 사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고전14:2,4) 회중안에서 방언통역과 함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교회의 덕을 위함이다.(고전14:5)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과(고전14:5)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 질문한 수사의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성령세례 받을 때 모든 신자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개인 기도시에 혹은 자기의 덕을 위하여 계속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령께서 회중 안에서 방언과 통역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쓰시는 도구는 아니다. 회중 안에서 성령은 그 뜻대로 성령의 나타남을 주신다.(고전12:11) 이러한 바울의 서술은 서로 모순된다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